교회와신앙

언제부터인가 ‘사회지도층’이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는 갑과 을이 존재한다는 암묵적인 가정하에 통용되는 말이다. 즉, 누군가는 지도를 하는 입장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지도를 받는다는 말이다. 이해 안 되는 단어 그리고 불쾌한 단어다. 이해 안 되는 것은 이 용어가 어떤 합리적 발생 근거를 가졌는지 찾지 못한 점이고, 불쾌한 것은 나를 지도해 달라 부탁하지도 않았건만 각종 매체에서 툭하면 지도층이란 말을 운운한다는 것이다. 즉, 교육 잘 받고 윤리적으로 생활하는 대부분의 멀쩡한 국민을 지도받아 마땅한 우민 취급을 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단어를 몹시 싫어한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가 지닌 폭력성에 알러지가 돋을 지경이다. 그 기원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 일학년의 늦은 여름날이었다. 그날 점심시간, 우리 학급은 눌러왔던 불만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폭발 기제는 학기 초부터 시작된 부반장 Y의 커닝이었다. 급기야 5교시 수업을 못 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교실에 들어왔다 놀란 눈으로 교무실로 돌아가신 미술 선생님, 그리고 그날 종례시간, 나는 그날 그 시간을 평생 잊지 못한다.

종례에 들어온 담임은 커닝의 증거를 말하라 했다. 담당 교과가 체육이었던 그의 손에는 밀대 자루가 들려 있었다. 서슬이 시퍼랬다. 장팔사모를 움켜쥔 장비 같은 그 모습에 대답이란 걸 할 만한 열네 살 여자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담임은 시험 치는 형태로 자리를 옮겨 앉으라 했고, 커닝 당사자 주변에 앉은 아이들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운 뒤 증거를 대라 했다. 먼저 일어선 몇몇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Y 바로 오른편에 앉았던 내 차례가 되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분명한 증거가 있었고, 어디서 용기가 났던지 또박또박 상황을 설명했다. Y가 손바닥에 번호를 적어서 물어왔다고, 그리고 문제는 빨래를 삶을 때 뚜껑을 닫는 이유를 묻던 가정시험문제였다고. 그때 나를 훑어 내리던 담임의 뱀 같은 눈길, 그 소름 끼치는 째려봄. 그러나 그것으로 그친 나는 다행이었다. 커닝 증거를 대지 못했거나 소요에 앞장섰던 아이들은 매 타작을 당했다. 밀대 자루, 아니 장팔사모가 부러지도록.

그날 일학년 사반 모두는 여름 노을이 어두워질 때까지 교실을 나서지 못했다. 육십 명 넘는 아이들 모두 울었고 나도 울었다. 그리고 서러웠다. 하지만 그날 나를 서럽게 한 것은 제 시간에 집에 가지 못한 것도 아니었고, 나를 쏘아보던 담임의 눈빛도 아니었다. 치마가 펄럭이도록 엉덩이를 맞던 친구들의 모습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고위세관원이었던 Y에 대한 담임의 비호는 더더욱 아니었다. 내 설움은 Y 뒤에 앉았던 ○○에게 담임이 했던 말이었다. 뒤에 앉은 너야말로 Y의 시험지를 훔쳐보았다는 어이없는 누명이었고, 성적이 비슷하다는 것을 이유로 대던 어처구니없는 억지였다.

지옥 같던 종례가 파하고, 채소 장사의 딸이었던 ○○와 산지기의 딸이었던 나는 어둠살이 내려앉는 길을, 버스 예닐곱 정류장이 되는 먼 길을 걸어 집으로 갔다.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 눈물이 꽉 찬 눈으로 버스를 타기도 무안했고 그 얼굴이 가라앉기 전에 집에 갔다가는 엄마가 가슴 아플 것을 알만큼의 철은 들었던 까닭이다.

그날 ○○는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말했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서 앞으로는 이런 억울한 말을 듣지 않겠다고. 그러나, 입술을 꼭꼭 깨물며 걷던 나는 엉뚱한 다짐을 두었다. 저런 선생의 지도는 받지 않겠다고. 이후, ○○는 정말 공부에 몰두했고 서울대에서 섬유를 전공하고 당시로는 꿈같은 이야기인 프랑스로, 파리로 떠났다. 그에 반해, 나는 그즈음부터 일기를 썼다. 내 서러움과 억울함을 백지에 대고 낱낱이 고발하는 것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조용히 삐딱한’ 학생이 되어갔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내가 어릴 때 겪었던 불평등과 어린 내가 당했던 불합리들이 여전히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제는 일정 부분 이해를 하고,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면 스스로에게 적당한 타협을 제시한다. 동서고금 사람 사는 세상 불의가 없을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이념이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또 때로는 필요악도 존재해야 하며 세상의 정의는 시간이 지나야 정확히 판별되는 것이라고.

그런데 이렇게 기특하게 잘 참고 있다가도 ‘사회지도층’이란 말만 들리면 발칵 화가 돋는다. 휴지 한 장 못 버리는 윤리로 무장하고, 남의 뒷담화에 말이라도 보태었다 하면 두고두고 양심 시달리는 사람을 두고 누가 무엇을 지도하겠다는 것인지. 게다가 법이란 것은 힘없는 국민이나 지키는 것이고 본인들은 초법적 존재로 여기며 상습적인 거짓말을 남발하는 그들. 게다가 그러한 행위에도 죄의식이라곤 1도 없는 뻔뻔한 그들에게 선량하고 보드라운 국민이 무슨 지도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말이다.

정말 궁금한 것은 ‘왜 유독 보도 매체들이 이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가’이다. 모르겠다. 그들은 정말 누군가의 지도 아래 기사를 써 왔고 또 쓰고 있는 것인지. 하지만 국민은 아니 최소한 나는 그럴 의사가 없다. 전혀 없다. 알고는 있을까. 우아한 척, 세련된 척 표현하는 이 ‘사회지도층’ 이란 말이 사실 국민의 마지막 자존심, 즉 역린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을.

어떤 이는 말 할 것이다. 이 편리한 단어를 폐기하면 대체할 용어가 없다 하고. 하지만 ‘사회상위층’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한다. 상위층이란 말은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단어가 아니다. 그저 자신이 뭔가 더 가졌거나, 상대에 비해 위치가 높다는 단순한 의미이다. 이를 통해 타인에게 힘을 행사하겠다는 갑을관계를 전제하는 건 아니니 대체 가능하지 않을까. 마음 같아서는 ‘사회선도층’이라 부르자 하고 싶은데 그 선도라는 게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고, 또 타인더러 선도하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니 이 역시 취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사람은 평생 배워야 하고, 또 지금을 평생교육의 시대라 말하지만 국민 모두가 자발적인 학생은 아니다. 배울 바 없는 이들에게 덮어놓고 지도받겠다는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그러고 보면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열네 살에 시작한 나의 고발과 나의 삐딱함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모양이다.

전성옥 집사

2012년 <월간문학>에 소설로, 2013년 <에세이문학>에 수필로 등단한 후 <에세이부산 동인>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대상'(2012년), ‘부산수필문예 올해의 작품상’(2023년)을 수상했다.